♧ 살리에르 증후군 ♧
지난 토요일엔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춘천에 들렀다가 우연히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잠시 방문하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향수에 잠시 젖으며 짧은 시간이지만 무척이나 마음이 흥분했었던 귀한 경험을 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골목대장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당시 골목대장이 되는 조건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중에 하나는 동네에서 구슬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다양한 딱지들을 다양하게 많이 소유한 친구가 단연 인기가 좋았고 그 친구를 중심으로 작은 공동체가 형성이 되고 그 친구는 그 소유한 구슬과 딱지를 배경으로 한 동안 골목대장의 아성을 구축하게 됩니다.
한창 자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골목대장 친구는 어느 날 서울에서 새로 이 동네로 이사온 친구로 인해 그 골목대장의 보위를 위협받게 되는데 그것은 서울에서 이사 온 친구가 어마어마한 신종 딱지와 시골 동네에서는 감히 구경도 못하던 신기한 모양의 새 구슬들을 다양하게 많이 보유하고 있어 자신을 따르던 심복들이 하나 둘씩 더 큰 힘을 소유한 친구를 중심으로 그 보위가 이전하게 되는 소위 <권력 이동>의 현실적인 아픔을 맛보게 되며 이어지는 마음 한 가운데 겉잡을 수 없는 시기와 질투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잘것없는 구슬과 딱지에 왜 그렇게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우리 동네 골목대장이라는 권력(?)을 둘러싼 작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경쟁 조직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2인자의 자리에서 겪는 심리적인 열등감, 바로 <살리에르 증후군>에 관련된 세상 모습을 잠시 스케치해보려고 합니다.
살리에르 증후군!
영화 <아마데우스>는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평생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끝내 모짜르트를 독살하고 만다는 내용인데 이 영화가 등장한 이후 극단적인 2인자의 심리상태를 이르는 용어로 ‘살리에르 증후군’이란 말이 두루 쓰이게 됩니다.
1980년 중반에 상영되어 이미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감동의 울림이 있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시놉시스를 소개하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고 성공한 궁정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하늘이 내린 광기 어린 천재적인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바라보며 마음 속에 생기는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시작된 광기로 가득 찬 파멸의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신이 내린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방탕하고 오만한 모짜르트의 행동과 모습들에 상처와 충격을 받은 살리에르는 자신에게 재능을 주지 않은 신에게 분노하며 자유분방한 모짜르트를 파멸시킬 음모를 꾸미게 되며 결국 파멸시키고 자신도 평생을 그 죄책감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1984년 <밀로스 포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는 <피터 새퍼>가 쓴 같은 이름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실제 현실의 역사 속에서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짜르트를 시기하고 파멸에 이르게 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만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 그려진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 속에서 인생의 질투와 시기를 그렸고 그로부터 2인자의 극한 열등감을 표현하는 용어인 <살리에르 증후군>이 생긴 것입니다.
실제 이름은 <살리에리>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살리에르>라 이름 붙여진 것도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속의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갈등의 진위 여부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이런 <살리에르 증후군>을 수없이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갈등구조를 배경으로 인간의 역사가 흘러 왔고 지금도 그런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소설 작품들이 이런 인간의 갈등구조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 이스라엘의 최고의 성군(聖君)인 다윗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 <사무엘서>의 전반적인 내용은 바로 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악의 축으로 같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도 처음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은 자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자)로 이스라엘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되면서 타락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앞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이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 승리를 축하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외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이 이 때부터 다윗을 경계하며 시기하고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죽이기 위한 온갖 계략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점차 파멸의 길을 자초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자리에서 어느 날 2인자의 자리로 전락했다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파멸하는 길로 가게 만드는 안타까움을 보이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살리에르 증후군>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 수없이 접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하느냐가 또 다른 삶의 과제로 부각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오면서 겪게 되었던 문제였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자식들이 커가는 가운데 안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이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가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안방극장에서 절찬리에 방영하였던 인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그 답의 한 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극 중에서 주인공이었던 카리스마 넘치던 인물 <강마에>는 능력 있던 지휘자로서 당시 <정명훈>이라는 당대의 걸출한 일인자로 인해 경쟁의 자리에서 밀려났던 사람으로 한 작은 시청의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되는데 여기서도 다시 또 다른 음악 천재 <강건우>에게 <살리에르 증후군>을 느끼게 되는데 극 중에서는 여주인공으로부터의 사랑의 승리자가 되면서 음악천재 <강건우>에게 그 <살리에르 증후군> 돌려 줍니다.
그리고 지휘 실력은 진정한 일인자에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은 또 다른 그의 최고의 매력적인 장점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한 분야에서 하나의 잣대로 평가되어 매겨진 순위로 2등이 될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우위에 설 수 있는 면이 있으므로 한 면만을 바라보고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종의 심리적인 병입니다.
저도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오면서 저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을 너무나도 많이 만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심리적인 위축감이 있었습니다. 삶을 겪으면서 제 스스로 얻게 된 삶의 지혜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생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의 앞에 나타나면 우선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장점을 찾아보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나만의 해석 방법을 터득합니다.
어느 누군가 인생을 정의하면서 ‘인생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감사하고 자랑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소중하게 개발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그것을 비교하기 시작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지켜나가는 모습을 만들어 가기 원합니다.
챔피언의 자리가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챔피언의 자리는 어쩌면 고독한 자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내려와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나보다 더 뛰어난 자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 자리에 앉더라도 그 자리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마음을 버리고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박수칠 때 떠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원히 2인자면 어떻습니까? 2인자도 대단한 자리이며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1인자가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서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한 1인자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삶이 조금은 더 편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삶의 진리를 깨닫는 과정의 시간을 돌아보니 어언 50년이 걸렸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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